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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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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유산

군자정 군자정 군자정 군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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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 지정일1990년 06월 30일
  • 시대조선 영조 40년(1764년) 중수
  • 소재지정읍시 고부면 영주로 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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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이 정자(亭子)는 다른 이름으로 연정(蓮亭)이라고 하는데, 원래 연못으로 둘러싸인 누정(樓亭)으로, 고부(古阜)지방 선비들이 음풍영월(吟風詠月)하던 곳이다.
1673년 군수 이후선(郡守 李厚先)이 연못을 고치고, 정자(亭子)를 보수(補修)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영조(英祖) 40년(1764) 군수 이세형(郡守 李世馨)이 중건하였으나, 퇴폐하여 1900년에 조규희(趙珪熙) 군수가 연못을 수축(修築)하고 군내(郡內) 인사(人士)들로부터 모금 (募金)하여 정자(亭子)의 중건(重建) 공사(工事)를 시작하고, 1905년 이창익(李昌翼) 군수 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10년 일본인(日本人) 소학교(小學校)가 이 곳에서 개교(開校)되었으며, 그 뒤 1926년 학교 이전으로 인하여 1927년 불하(拂下)하게 되자, 진사(進士) 은성우(殷成雨)가 불하(拂下)받아 은씨 문중(殷氏門中)에 기증(寄贈)하여 주민들에게 개방(開放)되어, 사정(射亭)으로 이용되었으며, 여러번 보수(補修)하여 유지(維持)되어 왔다.
이 곳 군자정은 옛날 고부(古阜)의 고을 향운설화(鄕隕說話)가 얽혀 있는 곳이다.
연못의 가운데에 위치(位置)하여, 사면(四面)이 연꽃으로 둘러 있으니 이 곳을 가리켜 연정(蓮亭)이라고도 하였다.

서쪽에는 화강암 판석(花崗岩 板石)으로 걸쳐 놓은 3칸의 돌다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느 기록(記錄)에는 판석(板石)이 2칸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세 칸이다.
정자(亭子)의 기록에 의하면, 남쪽 언덕에는 몇 아름되는 노거송(老巨松) 두 그루가 있 어, 한 그루는 연못 아래 누워 있고, 한 그루는 정자의 첨하(詹下:처마의 아래)를 덮어 연정(蓮亭)의 아취(雅趣)를 한층 돋우었다고 하는데, 두 그루의 노거송(老巨松)은 최근에 와서 그 자취를 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20년경에 말라 죽은(枯死) 것으로 짐작한다.
연정(蓮亭)이 군자정(君子亭)으로 바뀌게 된 것은 “연(蓮)은 꽃의 군자(君子)니라”(蓮花之君子者也)는데 연유(緣由)했을 것 같다.

1837년 노거송(老巨松)에 대한 군수 홍익모(洪益謨)의 시(詩)가 현판(懸板)에 있다. 군자정(君子亭)의 현판(懸板)은 백천 김상원(白川 金商源)의 글씨도 남아 있다.
창건 연대(創建 年代)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연못(蓮池)의 역사는 제법 오래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조선 중엽(朝鮮 中葉)이후 고부 군수들이 1년이 못되어 좌천(左遷)이 되거나 파직(罷職)되어 갔으며, 뿐만 아니라 고부(古阜) 고을에 인재(人才)가 나오지 않아 과거(科擧)에 급제 (及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연정(蓮亭)이 황폐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673년 현종(顯宗) 14년에, 그때 고부 군수 이후선(李厚先)이 연못을 파내고, 정자(亭子)를 개수(改修)하니, 홍백(紅白)의 연꽃이 스스로 피고(自生), 고부 땅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는 인재(人才)가 계속 나왔다고 한다.

향운설화(鄕運說話)에는 이 밖에도 신임 군수(新任 郡守)의 부임로(赴任路)에 따라서 군수의 관운(官運)이 좌우(左右)된다는 전설도 있었다.
또 향교(鄕校)의 자리가 현아(懸衙:郡 單位 機關)보다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고장의 운(鄕運)이 막힌다는 설(說)이 있어 지방 유림(地方 儒林)들의 발의(發議)로 1765년 영조 (英祖) 41년에 동헌(東軒:군청)을 지금의 고부 초등학교(古阜 初等學校) 자리로 옮겼다. - 지금은 동헌이 헐리고 없다 -

군자정(君子亭)은 90년이 지나서 1764년인 영조(英祖. 40年)때 군수 이세형(李世馨)이 중수(重修)하였으며, 130년이 지나서 1900년(光武 3年)에 군수 조규희(趙珪熙)가 먼저 연못을 파내고 수축(修築)한 다음, 군내(郡內) 19명의 인사(人士)로부터 몇 천량(천兩)의 기부금(寄附金)을 받아, 다음 해 1901년(光武 5年) 봄에 중건 공사(重建 工事)를 시작하여 4년이 걸려서 1905년(光武 9年)에 준공(竣工)하였다.

한때 일본 헌병대 주재소(日本 憲兵隊 駐在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뒤에는 사정(射亭)으로 사용된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 소유가 되어 있다.
지금 이 연못(蓮池)은 지난날의 정취(情趣)를 찾아 볼 나위가 없이 “영주 경로당(瀛州敬老堂)이 되어 있다.

교통

역, 터미널에서 고부행 시내버스로 30분, 승용차로 20분

주변관광소

고부향교, 장문리 오층석탑, 군자정, 남복리미륵암석불, 용흥리 석불입상, 용흥리해정사지석탑, 고부관아지

군부 연혁 및 군자정 경력(郡府 沿革 및 君子亭 經歷 -번역-)

본래 백제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인데 신라때 고부(古阜)로 고치고, 고려 태조 19년에 영주관찰사(瀛州觀察使)로 고쳤다.
광종 2년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다시 바꾸었다.
현종 10년에 다시 고부로 하였고, 충렬왕 5년에 영광군과 여러군이 병합(倂合)되였다는 사실이, 여지승람(與地勝覽)에 기록되었다.
갑오동학 혁명후인 경술년에는, 재판소(裁判所), 경찰서(警察署)가 있었고, 헌병대(憲兵隊)가 있어, 7개 고을을 관할하다가, 5년후인 갑인년에 남선철도(南鮮鐵道) 개통으로 인하여, 정읍군(井邑郡)으로 합병(合倂)하였다.

군자정(君子亭)은 어느 때 누가 건축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림기둥 3칸과, 돌다리 3칸, 정 자 둘레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그 이름을 연정(蓮亭)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붉은 연꽃 가운데 흰 연꽃이 피면서, 과거(科擧) 시험에 합격(合格)하고 벼슬에 오르게되는 일이 계속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영조 40년인 갑신년에, 이세형(李世馨) 군수가 중수하면서 말하기를 이 고을에 인재(人才)의 성쇠(盛衰)가, 연정의 흥폐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과연 보고 깨달음이 밝았다.

둘레의 언덕에 무성한 숲과, 좋은 대(竹)가 많이 있고, 뜰 앞에 두 아름되는 소나무가 있어, 반은 처마에 끝을 덮고, 반은 연못 가운데 있어 모든 사람이 사랑했었다.
헌종 3년 정유년에, 홍익모(洪益謨) 군수가 두 소나무를 보며, 읊조리면서, “긴 가지 푸른 빛이 그림 문창을 덮고 있음이 끝이지 말라”는 글귀를 남겼다.
중수(重修)하는 사람이 없어서 정자가 쓰러질 무렵에, 다행히 기해년 가을에 조규희(趙珪熙) 군수가 도임하여, 좋은 치적을 이웃 고을까지 펴서 행정을 잘하여, 백성이 화평하였으며, 관내의 못과 내를 준설하였다.

이 고을 19개면(面)에 협력하라는 통문을 내여 수천(數千)에 달하는 많은 의연금(義捐金)을 거두고, 신축년 봄에 중건(重建)이 다 될 무렵에, 조 군수의 전근(轉勤)으로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삼 사년(三, 四) 후에 완공하여, 무사습예(武士習藝)의 고장이 되었다.
그후 세상이 변란(變亂)으로 인하여 무예(武藝)를 폐지했다.

20년 전의 두 소나무가 말라 죽어, 정자의 경치가 나빠졌다.
임신년에 다행히 이 정자(亭子)를 경매(競賣)하게 되어, 지방 유지 여러사람과, 우리 은가(殷家)의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이것을 매입(買入)하니, 반래 문중(半萊 門中:고부 은씨)의 소유(所有)가 되면서 무사습(武士習)의 장(場)이 되었다.
슬프다, 고을의 흥폐(興廢)와 정자(亭子)의 영쇠(榮衰)가 천리(天理)의 순환(循環)에 있음이요, 사람의 힘으로써는 용이하지 아니 함이다.

이 정자가 조 군수(趙 郡守)의 중건(重建)과 임신년에 매입(買入)하여 유지하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오늘 아름다운 정자를 유지할 수 있는가.
뒤에 사람들도, 조군수와 유지들과 뜻을 같이하면 정자는 오래 유지될 것이다.
정축년(丁丑) 5월 단오(端午)
신운(新運) 은이철(殷以澈) 기(記)

군자정기(君子亭記)

내가 어린시절에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 나이 73세로 이 곳에서 자라서 이 곳에서 늙어졌다.
젊은 시절에 부친으로부터 읍양주선하며 어른을 모시고 무예를 익힐 때 그 때는 참으로 성대하였다.
불행히 세상이 변하여 풍속도 바뀌어 군자정이 군사 용지로 빼앗겨서 30여년간 주인이 없으니 정자가 헐고 연못이 황무하여 한갓 연잎에 이슬이 맺히고 버들가지에 바람이 스치니 우리들만 우울한 것이 아니요.
길가는 사람들 조차도 아까워 하였다. 이제 내가 재장으로 있으면서 뜻있는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중수를 하니 그전 모습으로 환원하여 기쁜 마음 한량 없구나.
슬프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이제 늙었으니 말이다.
이 정자에서 노니는 사람은 나보다 나이를 더한 사람이 몇이나 되며 동갑내기는 과연 몇 사람인가? 지금 재주있는 사람이 나보다 다들 젊다.
이 젊은이들은 읍양주선하여 어른을 섬기고 무예를 익혀가는 것을 보니 그 사람들이 두렵다.
나의 소원은 남은 나이 동 안에는 더욱 건강해서 노익장한 몸으로 정자에서 노소가 같이 놀면서 군자의 명망을 지킬 것이니라.
병자년에 은희형 근고

君子亭 懸板

翼然高閣似孤蓬 날듯한 높은 누각은 봉래같고
蓮唱菱歌鏡面中 연못가에서 노래하니 얼굴이 물에 빛이다
五月江深無夏日 물이 깊어 여름에도 더운날이 없고
十洲霞落又朝風 십주의 안개는 아침바람에 쫓기네
試筆君子從觀德 시합하는 사수들은 관덕으로 하며
感頌賢侯己施功 중수한 원님의 공덕을 칭찬하네
六一亭題何處在 육일정기록은 어데 있는가
獨余恪帳倚簾木龍 홀로 창문에 기대고 슬퍼하네
丙子 孟秋 可山 殷熙熒

君子亭 懸板

橋若淳木差亭若蓬 돌다리는 뗏목이요 정자는 봉래로다
椅花荷葉疊 中 연못에 꽃과 잎이 첩첩이 무성하다
峯頭遲上三更月 달은 산봉우리에 더디 오르고
洞口時來一經風 바람은 동학에 불어오다
伊昔見稱多士力 여러 사람의 힘을 칭찬하고
方今記頌故侯功 고을원님의 공덕을 칭송하다
題詩爲愛增顔色 시를 써서 사실의 빛을 더하니
粉白粧紅似盡木龍 분을 발러 화장한 그림 같도다
丙子仲秋寅谷殷東振

君子亭 懸板

池閣宛如蓬 지각은 완연 봉래같아
飄然在水中 물가운데 표연히 서있네
春華冬白雪 봄에는 꽃이요 겨울에는 눈이며
秋月夏淸風 가을에는 달이요 여름에는 바람이라
所習惟觀德 관덕을 연습하고
其爭不論功 경쟁하되 논공은 없다
耳卯將四時景 사시로 경치가 좋아
吟罷更題木龍 시를 읊고 다시 글을 쓰다
丁丑 小春
湖亭 殷 成 淑

君子亭柱聯

春深道嶽華千樹 봄은 도악(道嶽)이 깊으니 모든 나무에 꽃이 피고
鳳凰台上晴風色 봉황대 위에 안개가 개이고
月出斗峰夜二更 달이 두승산에 오르니 밤이더라
霜雪飽經松骨冷 서리눈이 많이 내리니 푸른솔이 차고
琴鶴樓前暮鼓聲 금학루(琴鶴樓) 앞에 해저문 북소리로다
火因 掃盡竹心淸 안개가 거두었으니 푸른대가 맑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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